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문단 편집) == 개요 == >"국가가 경인년(1350년, [[충정왕]] 2년 / [[공민왕]] 즉위 1년 전) 이래 왜적들의 침구를 당하자 나라에서도 계속 병사를 동원해 추격 체포했으나 뿌리를 뽑을 수가 없었습니다. 근년 들어 왜적들이 더욱 광포해져 장수를 살해하고 인민들을 노략질하니 바닷가의 주(州)·군(郡)마다 소란하기 짝이 없습니다. 심지어 경기(京畿) 지역을 재차 침범하는 등 전혀 겁내거나 꺼리는 것도 없으니 다가올 후환을 참으로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장상(將相)과 대신(大臣)들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방어 전략을 마련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만일 혹시 왜적이 무리를 지어 방비가 허술한 틈을 타 돌연 침범해 오면, 장차 무엇으로 그것에 대처하겠습니까?” >---- >'''《[[고려사]]》 <[[우현보]] 전>''' [[파일:QlR69Ti.png|width=350]] [[여몽전쟁|40여 년 동안 몽골과 벌인 전쟁]], 그 후로 [[원간섭기|80여 년 동안의 간섭]]에 의한 정치 혼란, 심지어 [[카다안의 침입|몽골 반란군의 잔당]]이나 [[홍건적]] 침입까지 그야말로 '''[[고려]]가 여기저기서 한계를 맞이한''' 시기에 [[일본]] 또한 [[원나라의 일본원정|2차례에 걸친 몽골의 침공]]의 여파로 [[가마쿠라 막부]]가 아예 붕괴하고 지옥 같은 [[남북조시대(일본)|남북조시대]]가 열리자 그야말로 고삐가 풀려버린 해적 집단인 [[왜구]]의 발흥을 배경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고려는 400여 년을 이어온 시스템의 부패, 정쟁으로 인한 국왕 살해, 국토가 털리는 상황에서도 [[요동]] 반도를 점령하는 등등 동아시아의 모든 국가들이 제정신이 아니었다. 물론 제각기 많은 문제를 가진 정권들이었지만 [[원나라]]가 짧은 기간에 망해 버리는 것으로 이 시대의 동아시아는 혼란의 정점을 찍고 있었다. [[왜구]]라 부르는 [[해적]] 무리가 한반도를 침략한 것은 고대 [[신라]](新羅) 대부터 이어진 유구한 역사지만 [[1350년]]을 기점으로 한 이 고려 말기의 왜구들은 규모, 침공 횟수, 전투력이 다른 시대의 왜구들에 비하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늘어났다. 또한 다른 왜구들과는 '''상당히 다른 정체성'''을 지녔다는 기록들이 상당수 나타난다. 어떤 학설에선 왜구의 시대구분으로 전기왜구와 후기왜구로 나누어 고려 말 왜구를 전기 왜구, 명초의 왜구를 후기 왜구라 하기도 하는데 이는 신라 대의 왜구와 비교하면 적절한 명칭으로 보기 힘들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기록만 봐도 신라대의 왜구의 규모와 침입 횟수가 고려 말 왜구에 못지않았으며 신라 또한 수도인 경주가 위협받고 때론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하는 등 나라의 존망이 걸린 문제였다. 어쨌든 대개 [[명나라]](明)에 심대한 타격을 미친 명초의 왜구가 [[중국]]과 [[일본]]의 연구자들에게 더 관심을 받은 반면에,[* <명초(홍무 ~ 영락기) 동아시아 해역에서의 왜구>, 윤성익] 국내에 미친 피해와 영향력을 따지자면 무려 수백 차례나 쳐들어왔던 이 고려 말 왜구의 끈질김이 더 크다 할 수 있다. [[임진왜란]]이라는 조선 중기의 대전쟁 때문인지 고려 말 왜구와의 사투는 국내 대중들에게도 상대적으로 인식이 약한 편인데, 그 실체는 단순히 노략질을 하는 왜구와의 전투를 떠나 '''고려라는 국가의 존망'''과 관련된 동아시아 혼란의 막바지를 장식하는 전쟁이었다. 장장 40여 년의 세월 동안 [[경상도]], [[전라도]], [[경기도]], '''[[평안도]],''' '''[[황해도]]''', 심지어 '''[[함경도]]''' 한반도 북부에서도 벌어진 대혈전은 해안 지대와 고려의 [[조운]](漕運) 시스템을 거의 붕괴 직전으로 몰아갔다. 당시의 고려는 정치조차도 무너져 가는 상황이었기에 중대한 위기였다.[* [[서울특별시|한양]]도 그렇지만 [[개성시|개경]]은 특히 조운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했다. 개경보다는 입지조건이 나은 한양조차도 배후 농경지가 부족해 인구 부양을 위해서는 외부에서 곡물을 들여올 수밖에 없었는데, 개경은 그보다 조건이 더 안좋았다. 이 당시 열악한 육상교통의 특성상 주요 곡물 반입 경로는 내륙 수운 내지는 해운이었다. 이 당시 왜구들은 해적답지 않게 '''내륙까지 들어왔으므로''' 해운은 물론이고 내륙 수운도 온전할 수 없었다.] 1380년, 왜구의 공세가 최절정으로 치달았지만 [[진포해전]] 때 절망적인 상황에서 극적으로 신병기인 화포를 활용해 승리했다. 그리고 수없이 국토를 지켜낸 명장 [[이성계]]의 활약과 마지막 [[황산대첩]]으로 고려를 괴롭힌 '''대규모 기병의 군세'''는 전멸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왜구의 침공은 계속되었지만 다른 시대와 비슷한 무장한 해적에 가까운 규모로 몰락해 버렸고, 이후에는 박위의 대마도 원정으로 혼란의 시대를 끝내게 된다. 또한 30여 년이 넘게 전국토에서 싸움을 벌이는 동안, 막강한 영향력을 얻은 신흥 무장 세력을 출현시켰고, 그런 신흥 무장 세력 중에 가장 대표적인 [[이성계]](李成桂)는 [[위화도 회군]](威化島 回軍)으로 개경의 조정을 장악, 마침내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는 데 성공한다. 참고로 말하자면 '''일본에 유달리 고려 시대 유물이 많이 있는 이유가 90% 이상이 이 때 노략질로 훔쳐간 것이 남아 있는 것이다.''' 나머지 10퍼는 [[일제 강점기]]. 때문에 지금 한국에서는 고려 시대 유물을 오히려 일본의 소장자에게서 돈 주고 사오고 있다고 한다. 당연히 개인 소장자를 대상으로 경매에서 구매해 오고 있는 것이다.[* 고려 시대 나전칠기로 만든 작은 나무 상자가 [[https://news.joins.com/article/15270022|30억원]]에 달한다. 물론 이건 경매이기 때문에 가격은 상당히 유동적이다. 때문에 국립 중앙 박물관과 문화재청도 한번에 몇 개씩 밖에 못 사오고 있다.] 일본 공공 기관이 소장하고 있는 고려 시대 유물은 약탈 증거가 없다며 철면피로 발뺌하는 중이며,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된 유물들과는 달리 국제법이나 국제 체제도 없었던 전근대 시대에는 끝없는 약탈과 전쟁으로 유물이 돌고 도는 게 세계적으로 흔한 일이었기 때문에 600년 ~ 700년 전 중세 시대에 경로도 불분명하게 들어온 유물을 무상으로 돌려받는 것이 힘들다는 문제도 있다. ||[youtube(fvMAiSam-2s)]|| ||[[토크멘터리 전쟁사]] - 111부 동북아시아의 적, [[왜구]]의 등장 || ||[youtube(cjPaCUTKh2Y)]|| ||[[토크멘터리 전쟁사]] -112부 왜구를 막자, 고려의 반격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